음식평론가 황광해의 식유기
소화·흡수가 용이하여 회복식으로 손꼽히는 죽은 몸이 아플 때에만 먹는 음식이 아니다. 보양식, 별미음식으로 다양한 변신이 가능하다. 선선한 바람이 불기 시작하는 9월에는 따뜻한 죽 한 그릇 어떨까?


“죽지 못해 먹는 음식이 죽(粥)이다.” “저 집은 죽도 못 끓여먹을 만큼 가난하다.” 어린 시절 숱하게 들었던 이야기다. 모두 다 가난했다. ‘밥술이나 먹고 살면 다행이다’ 싶은 시기를 넘겼다. 죽은 가난의 대명사였다.


죽 중에서 가장 슬픈 죽은 ‘풀죽’이다. 밀가루로 죽을 쑤면 풀이 된다. 장판 등을 바를 때 사용하는 풀이다. 그걸 먹는다. 배고파 죽는 것보다는 나으니 먹었다. 슬픈 풀죽이었다.



죽의 화려한 변신


문헌에 보면 늘 타락죽(駝酪粥) 이야기가 나온다. 타락죽은 우유와 곱게 간 쌀 혹은 찹쌀을 적절한 비율로 넣고 끓인 죽이다. 궁중이나 민간에서 널리 보양식으로 먹었다. 우유가 귀한 시절이었으니 우유를 끓인 죽은 보양식 노릇을 할만 했다.


▲타락죽. 죽 가운데 잣과 대추로 꽃 모양을 냈다.


조선시대 역사를 공부하다 보면 ‘대윤(大尹)’ ‘소윤(小尹)’이란 표현이 나온다. 너무 복잡하니 간단하게 줄이자. 대윤은 윤임이고 소윤은 윤원형이다. 대윤 일파는 조선의 12대 국왕인 인종을 밀었고, 소윤 일파는 다음 국왕인 명종을 밀었다. 인종과 명종은 모두 중종의 아들로 이복형제다. 유명한 문정왕후와 소윤은 한편이다. 명종이 즉위하자마자 소윤 일파는 대윤과 사림파를 궁중에서 쫓아내고 권력을 잡았다. 그 중심에 소윤 윤원형이 있었다. 화무십일홍 1565년, 문정왕후가 죽었다. 소윤 윤원형도 권력을 잃는다. 힘을 잃은 권력자는 바로 ‘적폐세력’이 된다. 나쁜 짓도 많이 했다. 바로 탄핵안이 나온다. 줄줄이 풀어내는 죄목 중에 ‘타락죽 남용 죄’가 나온다. 궁중에서 사용하는 타락죽 만드는 기구를 사사로이 자기 집에 가져다 사용했다, 타락죽 만드는 궁중의 낙부(酪夫)를 자기 집에 데려가서 타락죽을 만들게 했다. 그는 이렇게 만든 타락죽을 실컷 먹었으며 아이들과 첩까지 배불리 먹게 했다. 죄목은 줄줄이 넘친다. 윤원형은 귀양을 떠났다. 황해도 귀양지에서 윤원형과 아내 정난정은 음독자살한다.


‘궁중 타락죽’이라는 표현도 있지만 엉터리다. 궁중뿐만 아니라 민간에서도 먹었다. 우유가 귀하니 쉽게 구할 수는 없었지만 이 무렵 나온 ‘수운잡방’이라는 책에도 타락죽은 나온다. 지방 민간에서도 먹었다는 뜻이다.


    

▲삼청동 ‘소선재’에서 만난 타락죽. 우유에 쌀을 갈아 넣고 끓여 우유죽이라고도 한다.


굳이 타락죽을 권하진 않는다. 우유는 흔해졌다. 그래도 궁금한 사람들을 위한 팁 하나. 얼마간 고급스런 한식집의 메뉴판을 미리 보기를 권한다. 한식, 한정식 집 중에는 타락죽을 내놓는 곳들이 더러 있다. 필자는 삼청동 ‘소선재’에서 타락죽을 먹어본 적이 있다. 계절 별로 타락죽과 단호박 죽 등을 번갈아 내놓는다. 미리 확인할 필요가 있다.



방풍의 향이 사흘간 사라지지 않는다.


방풍은 봄나물이다. 이파리가 마치 은행나무 잎 같다. 지금은 흔하지만, 별로 찾지 않던 나물이다. 자연산과 재배가 있다. 광해군 시절 문신인 교산 허균이 쓴 도문대작(屠門大嚼)에서 방풍나물을 처음 알았다.


“방풍죽(防風粥): 나의 외가는 강릉(江陵)이다. 그곳에는 방풍이 많이 난다. 2월이면 그곳 사람들은 해가 뜨기 전에 이슬을 맞으며 처음 돋아난 싹을 딴다. 곱게 찧은 쌀로 죽을 끓이는데, 반쯤 익었을 때 방풍 싹을 넣는다. 다 끓으면 찬 사기그릇에 담아 뜨뜻할 때 먹는데 달콤한 향기가 입에 가득하여 3일 동안은 가시지 않는다. 세속에서는 참으로 상품의 진미이다. 나는 뒤에 수안군(황해도)에 있을 때 시험 삼아 한 번 끓여 먹어 보았더니 강릉에서 먹던 맛과는 어림도 없었다.”


▲멥쌀에 방풍잎을 섞어 끓인 방풍죽은 강원 지역의 사찰음식이다.


‘도문’은 푸줏간 대문이다. ‘대작’은 크게 입맛을 다신다는 뜻이다. 허균이 유배를 갔을 때 쓴 글이다. 귀양 간 신세니 음식을 마음대로 먹을 수 없다. 이제 먹을 수 없는 음식을 그리며 입맛이나 크게 다신다는 뜻이다. 오래 전에 먹었던 맛난 음식들을 꼼꼼하게 기록으로 남겼다. ‘한반도 최초의 식객’이란 별명이 붙은 이유다. 엉뚱하게도 첫머리가 ‘외가 강릉의 방풍죽’이다. 쇼킹했다. 고기가 아니라 방풍, 그중에서도 죽이다. 내용도 상세하다. 향이 3일간 사라지지 않는다? 이쯤 되면 궁금하지 않을 도리가 없다. 강릉이라?


마침 강릉에는 필자와 친분이 있는 이가 썩 괜찮은 음식점을 운영한다. 복어라면, 복어누룽지탕 등을 만들어 내놓곤 하는 이다. 전화로 방풍죽이 가능하겠느냐고 물었다.

몇 해 전 초봄, 드디어 강릉 ‘기사문’에서 방풍죽을 만났다. 자연산 방풍나물로 끓인 죽은 향긋했다. 하지만 ‘3일간 향기가 남는 방풍죽’은 불가능했다. 먹고 나서 30분도 되지 않아 향은커녕 맛도 사라졌다. 허균의 ‘도문대작’에는 ‘이슬 맞은 방풍나물’을 이야기한다. 낮에 방풍나물을 따서 향이 나지 않는 것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왼쪽부터) ‘기사문’의 방풍나물 무침과 방풍나물. 방풍나물은 제주도, 거제도, 통영, 강릉 등 바닷가 모래사장에서 자라는 약용식물이다.


더 황당한 것은 조선 후기 문신 윤기(1741-1826년)의 ‘무명자집’에 나오는 방풍죽이다. ‘무명자집’에는 중국의 이야기이긴 하지만, “방풍죽을 먹었는데 그 향이 7일간 사라지지 않았다”는 내용이 있다. 3일도 불가능한데 7일이라. 중국 특유의 허풍이다, 싶지만 궁금하긴 하다. 내년 봄에는 이른 아침에 이슬이 마르지 않은 방풍을 직접 따서 죽을 끓여 먹어볼까, 싶다.



녹두죽은 다 먹는 줄 알았다


호남음식을 설명할 때 “호남사람들은 맛없는 음식을 먹으면 큰일 나는 줄 안다”는 표현을 자주 쓴다. 실제 호남을 가보면 같은 식재료로 희한한 음식을 만들어낸다. ‘닭고기 코스 요리’도 그중 하나다. 2Kg 이상 되는 크기의 닭을 통째로 해체한다. 가슴살과 모래주머니로 닭회를 만든다. 석쇠 위에 닭의 살코기를 굽고, 나머지는 삶아서 백숙으로 내놓는다. 이쯤 되면 대단하다는 생각이 든다. 결정타는 마지막이다.


    

▲여수 ‘약수 닭집’. 회가 시작이고, 녹두죽이 마지막이다.


닭 국물로 녹두죽을 끓여낸다. 이게 별미다. 외지 관광객은 닭고기는 양이고 녹두는 음이라고 그럴 듯하게 해석하지만 정작 주인에게 물어보면 대답은 엉뚱하다. “닭고기 먹고 나면 국물 남고, 그 국물에 녹두죽 끓이면 맛있다”는 간단한 말이다. “이거 대단하다” “이거 맛있다”고 하면 더 엉뚱한 대꾸가 돌아온다. “그럼 다른 지방 사람들은 닭고기 먹고 녹두죽 말고 뭘 먹는대요?”다.


녹두죽 값을 따로 받는 것도 아니다. 닭고기 코스요리의 마지막이자 디저트 같은 개념이다. 좀 더 달라고 하면 흔쾌히 한두 그릇 더 내놓는다. 전남 함평의 ‘시골집’이나 여수의 ‘약수닭집’에서 먹는 닭고기 코스요리 그리고 녹두죽, 대단하다.



게로 끓인 죽


‘깅이’는 제주도 사투리다. 게를 이르는 말이다. ‘갱이’ ‘겡이’라고도 부른다. 제주도에서는 게 중에서도 특별히 작은 놈을 ‘깅이’라고 부른다. 참게를 깅이라고 부른다는 말은 틀렸다. 참게가 아니다. 아주 작은 돌게 등 바닷가에서 쉽게 볼 수 있는 작은 게다. 잡아도 먹을 것도 없고 딱딱하기만 하다. 이걸 갈아서 쌀이나 찹쌀 등을 넣고 죽으로 끓인 것이다. 작은 게, 쌀, 소금만 들어간 간단한 음식이다. 맛이야 뻔하다. 게 향이 난다.


▲‘모메존’ 깅이죽. 게를 갈아 끓인 깅이죽은 해녀들이 몸을 보신하기 위해 즐겨먹었다고 한다.


제주도 공항에서 멀지 않은 ‘모메존’이라는 식당에서 깅이죽을 먹었다. 죽 위에 검은 깨를 뿌려서 나온다. 게를 갈아서 끓였으니 겉모양으로는 이게 깅이죽인지 뭔지 알 도리가 없다. 깅이죽을 먹으면서 죽 위에 깅이 두어 마리를 올렸다. 빨간 색깔이 아주 고왔다.


본문에 소개된 맛집 정보

  

   맛집 정보

     1.   소선재: 서울 종로구 삼청로 113-1 / 02-730-7002

     2.   기사문: 강원 강릉시 정원로 78-22 / 033-646-9077

     3.   약수닭집: 전남 여수시 구봉산길 77-8 / 061-642-8500

     4.   모메존: 제주 제주시 도두3길 17 / 064-711-05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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